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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계곡마다 얼음이 녹아 재잘재잘 흐르고 버들강아지 참외 배꼽 같은 움을 틔웠다. 바야흐로 봄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쑥을 캐러 간다. 이맘때쯤 어린 쑥이 지천이었던 고향 들판이 떠오른다. 봄이면 도다리, 들깨 쑥국도 맛있지만 노란 콩고물의 쑥 향기 진한 쑥떡은 맛뿐만 아니라 어린 날 향수의 그리움이 아련하다.
오래된 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쑥 캐러 가자는 말에 손길이 바빠졌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봄 마중 나가는 일은 설렘이다. 봄볕을 가려줄 모자, 작은 칼 한 자루, 면장갑, 캔 쑥을 담아올 자루. 얼핏 보면 밭일 나가는 농부가 따로 없다. 쑥을 캐는 일도 즐겁지만 봄이 오는 들판에서 새참 먹는 재미도 솔솔 하다. 따뜻한 커피와 귤, 사과를 챙겨 봄의 전령사인 쑥을 만나러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해마다 쑥을 캐던 단골 장소다. 아직 바람은 제법 쌀쌀하게 불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수다를 떨며 봄볕 아래에서 쑥을 캘 수 있는 것은 여자로서 느끼는 특별한 재미가 아닐까. 쉼 없이 재잘거리는 중년 아줌마들의 수다를 엿듣고 있던 진달래꽃도 오므리고 있던 봉우리를 열어 꽃잎을 쫑긋 세운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생명의 움트임이 꼬물대는 들판에서 즐기는 봄소풍은 여유롭다. 쑥 냄새는 봄볕에 묻어나는 풀향기와 함께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어릴 적 추억을 되돌아보게 한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쑥은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를 생각하게 한다.
“지푸라기 속에 덮여서 자란 쑥은 키는 크지만 영양가가 없고, 혹독한 겨울바람을 견디느라 땅에 바짝 붙어 있는 이 통통한 쑥이 좋은 것인 거라”
들판 저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른 봄 엄마와 쑥을 캐러 가면 자주 들려주던 말이다. 어쩌면 시련을 이겨낸 쑥처럼 당신의 딸도 억척스럽게 살아 온 자신과는 다르게 꿋꿋이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소쿠리 한가득 쑥을 캐던 엄마의 봄은 어린 자식들의 양식이 아니었을까. 양지라고 해도 아직 설익은 봄볕이 차가운데 쑥은 고개를 쏙쏙 내밀고 있다.
봄이 되면 엄마는 갓 캐온 쑥으로 쑥떡을 했다. 찹쌀을 불려 놓고 소금물로 쑥을 파랗게 데쳤다. 불린 찹쌀과 쑥을 똬리 틀어서 머리에 이고 엄마는 방앗간으로 갔다. 한참 만에 반죽이 된 쑥을 이고 돌아오는 엄마의 키는 한 뼘이나 줄어들어 자라목처럼 보였다. 마루에 기름종이를 깔고 그 위에 갈아 온 콩가루를 부었다. 엄마는 반죽이 손에 달라붙지 않게 물을 묻혀 가며 뜨거운 쑥 반죽을 얇게 펼쳤다. 고소한 콩고물 냄새에 벌써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기름종이가 잘리지 않게 칼 대신 접시로 먹기 좋은 크기로 숭덩숭덩 잘랐다. 쑥떡의 모양을 내는 것은 나의 담당이었다. 손바닥에 콩고물을 묻히고 납작하게 눌러 줄을 맞추었다. 접시마다 담아 이웃집으로 날랐다. 해마다 엄마의 쑥떡은 식구들과 집성촌이던 동네에 새봄을 먼저 전했다.
요즘은 집에서 떡을 잘하지 않는다. 방앗간에서 하면 번거롭게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시간도 단축된다. 하지만 어릴 적 그 맛과 추억을 맛볼 수 없다. 엄마가 하던 대로 흉내를 내 본다. 찹쌀을 불려 밥솥에 앉혀 놓고 쑥을 여러 번 씻어 물기를 뺀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쳐 숭덩숭덩 썰었다. 찰밥에 썰은 쑥을 넣어 함께 믹서기로 갈았다. 방앗간에서 사 온 콩고물을 접시에 펼치고 반죽을 펴 납작하게 쑥 인절미를 만들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가까운 이웃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잠깐만에 맛볼 수 있는 방앗간의 수월함이나 전문가들이 만든 것에 비할 순 없지만 그 정성과 손맛은 훗날 또 다른 기억의 편린으로 남을 것이다.
쑥은 엄마의 체취와 목소리를 떠 올리게 한다.
“모진 겨울바람을 견딘 쑥이 좋은 것이여.”
엄마의 목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온다.
*유서희 약력-'내 인생에 사과한다' 저자
밀양출생
수필가 · 시인 · 시낭송가 · 목소리디자이너
글꽃소리 시낭송연구소 운영
유서희TV-유튜브 채널운영
강의-시낭송 · 목소리디자인
《국제문예》 신인상 수필부문 (2007)
《시와시학》 신인상 시부문 (2017)
《공단문학》 최우수상 수필부문 (1999)
《제9회 전국재능시낭송경연 본선대회》 은상 (1999)
한국 낭송명시집 CD-48인의 대한민국 대표 시낭송가 선정(2006)
입체시낭송(2018) · 동시낭송법(2002) 개발
글짓기 · 시낭송 · 성경동화구연 대회 심사위원, 심사위원장,
KBS 울산라디오-‘내 마음의 휴식’ 출연
CBS 울산라디오-‘우리동네 도서관’ 출연
한국문인협회 · 울산문인협회 · 시와시학문인회 ·
울산여성포럼회원· 수필가협회 회원
수필집 『내 인생에 사과한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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