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평생을 바쳐 이룩해낸다면 그 일이 크든 작든,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실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자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치욕적인 형벌을 감수해냈고, 결국 《사기》를 집필했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하양 지방에서 한 조정의 태사령을 지낸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을 관측하고, 달력을 개편하며, 국가 대사와 조정 의례를 기록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어렸을 때부터 《춘추좌씨전》 같은 고문을 줄줄이 읽던 신동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전국을 여행하며 문물을 익혔고, 그 후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뒤를 이어 태사령에 올랐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즉위 후 나라의 명으로 달력 개편 작업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통사 집필을 결심하고 역사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전국을 답사하여 보다 정확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무제 치하에서 중국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를 위해서도 지금 역사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기원전 91년에 있었던 흉노족 정벌전쟁이 그 원인이었다.
당시 외정에 몰두했던 한무제는 이릉이라는 장수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흉노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릉은 서북의 요충지인 거연에서 흉노족과 대치하여 피나는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그들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한 번도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는 한무제의 노여움이 하늘을 찔렀다. 모든 군신들이 이릉의 삼족을 멸해야 한다느니, 이릉을 처단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로 한무제의 비위를 맞췄다.
그때 오직 사마천만이 이릉을 변호했다. 이릉이 최선을 다해 흉노족을 막았으나 화살과 군량미 부족으로 더는 싸움을 하지 못한 것이니, 꼭 이릉만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 변론의 요지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무제는 사마천을 끌어내라 이르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사마천은 기가 막힐 뿐이었지만 분기탱천해 있는 한무제 앞에서 그를 변호해줄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감옥에 갇힌 사마천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한나라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한 가지는 일종의 벌금으로 50만 전을 내고 사형을 면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마천의 가세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금액이었다. 나머지 한 가지 길은 남자로서는 차마 선택하지 못할 끔찍한 형벌인 궁형을 받는 길이었다. 궁형은 거세를 뜻하는 것으로 차라리 사형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낄 만큼 가혹한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뒤를 이어 통사를 집필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궁형을 선택한 것이었다. 궁형을 받고 2년 후, 한무제는 그에게 사면령을 내렸고, 중서령이란 직위에 봉했다. 이는 황제의 후궁들을 보좌하는 일종의 비서직으로 거세를 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마천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궁궐 내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각종 사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모든 자료들을 모은 후 은퇴하여 《중국 통사》 집필에 들어갔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장 52만 6,500여 자에 달하는 대기록으로 본기12권, 서8권, 표10권, 세가30권, 열전70권 등 총 130권에 달하는 역작이었다. 옛 신화 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본래 명칭은 《태사공기(太史公記)》였으나 후한 말기에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과거 황실에서도 관행으로 궁정의 연대기 기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기》는 그 때까지 나온 역사서들과는 다른 중대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고, 그 중 본기에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또한 연표를 사용하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각 제후국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세가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제후들을 다루었고, 서에는 역대 정책과 제도 등을 설명했다.
마지막 부분은 열전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했으며, 주위에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행동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했다. 어떤 인물이 본보기가 될 행동과 잘못된 행동을 동시에 했다면, 그 행동들을 다른 장에 각각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예리한 논평을 첨가했다.
《사기》의 서술 방식은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또한 그 이래로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고,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