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테무친은 중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사상 최대의 정복에 나선 100만 명의 몽골족은 결국 인더스 강 유역에서 도나우 강 까지, 또한 태평양연안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3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지역을 장악했다. 어떠한 군대도 대적할 수 없었다. 몽골족은 대서양 연안 까지도 정복할 여력이 있었다.
테무친은 스스로를 칭기즈 칸이라고 칭했다. 몽골인들은 칭기즈 칸을 법과 문자, 문화를 안겨준 훌륭한 지배자로 존경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방해가 되면 어느 누구라도 앞뒤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짓밟아버리는 야만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칭기즈 칸에게는 자신이 이룬 업적과 단 한 장의 그림이면 충분했다. 그 외의 것들은 남기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생각했다. 그는 몽골인에게 문자를 남겼지만 자신의 연대기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나 아들인 오고타이가 '몽골 비사'를 펴냈는데, 이 책은 칭기즈 칸에 대한 신빙성이 있고 포괄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아내인 보르테가 인질로 잡혔을 당시 테무친은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느낀 좌절감은 오래도록 그의 의식에 남아 있었다. 테무친의 아버지가 죽자, 그가 속한 부족은 두 미망인과 일곱 명의 자녀를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테무친 가족은 먹을 양식이 없어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버림받은 이들은 들쥐를 비롯한 초원의 야생동물을 잡아 연명해 나가며 서로 먹을 것을 놓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무친이 14세 때 자신이 잡은 야생동물을 이복형인 벡테르가 훔치자, 동생 카사르의 도움을 받아 이복형을 살해했다. 이렇듯 형을 죽여 집안의 기둥으로 올라섰지만 테무친의 권력욕은 잠들지 않았다. 평화는커녕 계속해서 재난이 이어졌다. 이들이 죽은 줄만 알았던 부족은 복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테무친을 사로잡아 노예로 삼았지만, 테무친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집안의 재산을 늘려 말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이 말을 도둑맞기도 했다. 메르키트의 습격 사태를 경험하면서 테무친은 초원에서의 삶은 숙명적으로 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평화를 얻으려면 자신이 분쟁을 종식시킬 수밖에 없었다.
메르키트 부족에 대한 복수를 마친 후, 테무친 일행은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 무리에 가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무카와도 다투게 되었고, 이로써 몽골족 내에서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거의 사반세기 동안 주도권을 놓고 서로 싸우며 약탈과 살인을 반복했다. 테무친이 모든 몽골족의 칸으로 선출되자, 화가 난 자무카는 테무친 수하에 있던 70명을 사로잡아 끓는 물에 던져버렸다.
1204년, 자무카는 자신이 칭기즈 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추종 세력들을 규합해 자무카가 승리를 자축하는 축제장으로 난입해 자무카 일파를 무력화시켰고, 자무카는 혼비백산한 채 도주했다. 마지막 남은 자무카의 추종 세력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자무카를 잡아 칭기즈 칸에게 바치자, 칭기즈 칸은 숙적인 자무카를 처형한 것이 아니라 자무카를 배반한 자들을 처형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배반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로써 20년간에 걸친 칭기즈 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제 몽골인들은 전혀 다른 민족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수렵생활을 하며 서로가 패를 갈라 싸우던 화적떼였다면, 이제는 중앙에서 관할하는 우편제도와 조세제도를 갖춘 군사 대국이 된 것이다. 칭기즈 칸은 초원에 있는 숲을 개간했고, 백성들을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조직했으며, 그들에게 거구지를 할당해 주었다는데, 이러한 변화는 유목민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몽골족에게는 아주 놀라운 발전이었다. 또한 성과주의가 채택되어 열심히 일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비천한 신분이라도 출세할 수 있었다. 이전의 귀족 칭호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몽골족은 중세의 중국과 페르시아, 그리고 유럽의 수준 높은 문화와 비교하면 수백 년이나 뒤쳐져 있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종교도 없었고, 그림도 그릴 줄 몰랐으며, 빵도 구울 줄 몰랐다. 또한 양모를 짤 줄도 몰라 압착해 펠트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이다. 칭기즈 칸은 문맹인 자신의 종족에 법을 도입하기 위해 타민족 출신들을 고용했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족 사람들이 중용되었는데, 특히 위구르 족의 문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몽골인의 문자로 정착되었다.
칭기즈 칸은 급진적인 개혁가이긴 했지만, 자신이 정한 초원의 법칙은 항상 지켰다. ‘항상 움직여라. 멈춰 서 있는 자는 쉽게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 ‘지배 조직을 견고하게 하려면 경쟁자를 키워라.’ 자신의 군대를 항상 행군시킨 칭기즈 칸은 장벽치는 것을 경멸했고, 전통적인 펠트 움막생활을 하며 원정에 나섰다. 그가 마련한 건축물이라고는 다리와 노획물을 모아 두는 창고가 전부였다.
칭기즈 칸은 점점 강성해지는 자신의 백성들을 초원 너머로 이끌었다. 그는 몽골족들이 이전에 서로를 향해 공격하며 발산하던 에너지를 외부의 적에게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고비 사막을 거쳐, 이전부터 비단과 귀금속의 유입처였던 중국으로 향했다. 그 다음에는 서쪽으로 향해 카스피 해와 드네프르강에 까지 이르렀다.
이곳에서 몽골군은 최고의 전략가인 수베테이 장군의 지휘아래 유럽군과 최초로 격돌했다. 상대는 므스티슬라브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왕자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이었다. 몽골군은 겁을 먹고 달아나는 시늉을 하면서 러시아군을 유인했다. 므스티슬라브 형제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기고만장해 있을 때, 몽골군은 말을 돌려 추격자들을 무찔렀다.
승리의 축제는 패전한 러시아군의 등위에서 펼쳐졌다. 몽골군은 사로잡은 러시아 귀족들을 묶어 땅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서 춤을 추며 승리의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카스피 해의 동쪽 기슭까지 물러났다. 이번 전투는 탐색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4년 후 몽골군은 또다시 서쪽으로 진격해 독일의 튀링거발트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퇴각했다. 몽골군은 약탈하고 정복하려고만 했지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칭기즈 칸은 몽골군의 원정 과정에서 초기에만 앞장섰다. 몽골이 거의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할 때였다. 오고타이, 봉케, 쿠빌라이, 훌라구, 등이 바그다드와 키예프를 정복했고 러시아를 굴복시켰다.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칭기즈 칸은 아시아인들이 최초로 세계를 지배하는 데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화를 구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칭기즈 칸이 있기 이전에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몽골군은 중국에서 받은 쌀과 차, 게임카드를 서양에 전달하고, 당근과 레몬 등을 중국에 전했다. 몽골족이 지배할 때 중국 의사들은 페르시아에서 의료활동을 했고, 독일인 광부들은 중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몽골족은 국가를 파괴하긴 했지만 문화까지 파괴하진 않았다. 외국의 상인과 학자들은 환대받았고, 신하들은 복종하기만 하면 종교의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몽골족의 지배보다 더 가혹한 지배는 얼마든지 있었다.
칭기즈 칸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특별히 야만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물욕이나 파괴욕, 혹은 종교적인 열정때문이 아니라 전략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몽골인들의 잔인성은 바르바로사 대왕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보여준 잔인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칭기즈 칸은 언제나 적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 주었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응징했다. 칭기즈 칸은 청소년 시기의 어려운 여건을 딛고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되자 비로소 안식을 찾았고, 금욕적이고 신중한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칭기즈 칸의 부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유라시아는 분열 상태에 있었고, 중국과 페르시아, 유럽에서는 이렇다 할 강대국이나 강력한 군대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족은 차례차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은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한 후, 그 후유증 때문에 1227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